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인 이야기/비판 (문단 편집) === 12권 === * 카라칼라 황제의 안토니누스 칙령으로 속주세가 폐지되어서 세수 감소가 일어났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로마 시민권을 수여한 건 맞지만 세금은 그대로 내야했다. 상속세와 노예해방세랑 인두세+토지세를 바꾸는 바보는 이 세상에 없다. 카라칼라는 폭군이긴 했지만 상당히 명석하고 법 지식이 풍부한 황제였다. 올린 상속세와 노예해방세는 마크리누스 황제가 다시 돌려놓았다. * 이미 6권에서 티베리우스의 동생이자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아버지 대 드루수스를 이름 미상의 다른 귀족 초상화로 서술한 전례가 있어서 놀라운 일은 아닌데, 12권에서도 카라칼라의 동생 게타의 초상화를 엘라가발루스의 초상화라고 소개하고 있다. * 안토니누스 칙령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데 그렇지 않다. 로마 사회의 유동성을 막았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해놓으면서 사회 계층표를 넣었는데 호네스티오레스와 후밀리오레스 분화는 이미 오현제 시대에 나타났다. 로마 시민권이 이탈리아 반도로 더 나아가 속주 각지에 퍼지는 지리적인 상황과 일인독재인 원수정이 시작되면서 로마시민의 실질적 지위는 꾸준히 낮아지게 된다. 오현제 시대가 되면 로마 시민은 호네스티오레스와 후밀리오레스로 분화했고 이 둘을 처벌하는 방식을 다르게 하라고 한 황제가 현군으로 불리는 오현제들이다. 사회 유동성은 오히려 증가했다. 극소수의 원로원 계층과 소수의 기사계급 계층이 관직을 독점하던 게 원수정이지만 3세기부터 모두가 로마인이 되고 잇따른 이민족의 침입으로 실력제일주의가 나타난다. 3세기 황제들과 4세기 로마 장군들의 출신을 보면 얼마나 계층 이동이 활발했는지 알 수 있다. * 안토니누스 칙령 이후에도 보조병 부대는 후기 로마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또한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고 해서 군단병의 급여를 받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급여가 유지되었다. * 방위선을 지키는 전력의 노령화는 작가 창작이다. * 시오노 나나미는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대때 [[율리아 마이사]]가 울피아누스가 기용하면서, 법률가 출신들이 내각을 책임지는 방향인 것처럼 서술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세베루스 왕조 치하에서 군사적 색채를 빼고 법률가 출신의 행정관료들을 근위대장 중 한명으로 기용한 일은 플라우티아누스가 죽은 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아래에서 있던 조치였다. 시오노가 서술하는 것과 달리 카라칼라 시대때의 근위대장 마크리누스만 하더라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절부터 변호사와 재정전문가로 활약한 행정관료 출신 근위대장이었다. * 12권에 서술된 3세기의 위기 기간의 황제들을 서술할 때, 19세기 때부터 일찍이 온갖 날조로 가득하다고 고증된 위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속 내용을 사실인양 기록하고 이를 독자들에게 작가가 상상까지 붙여 서술하고 있다. 특히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고르디아누스 3세의 출신 배경과 가계를 살펴보면 작가의 상상까지 더해진 현대판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해당 황제들의 가계가 죄다 잘못 서술되어 있다. * 고르디아누스 3세의 장인 [[티메시테우스]]를 소개하면서, 소년황제가 일찍부터 심취할 정도로 매력적이고 완벽한 섭정이었고 상황 때문에 무너졌다는 식으로만 서술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군사적 움직임을 가져가지 않았으면 고르디아누스 3세가 장기간 재위를 차지했을 것이라고 단정짓고 있다. 그러나 티메시테우스는 그 능력이 뛰어났음에도 권신이었고, 고르디아누스 3세 정부는 페르시아의 샤푸르 왕이 241년 침공하기 전인 240년부터 내부적인 이유로 흔들리고 있었다. 아프리카 총독이 카르타고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도나우 강에서는 고트족이 국경을 침범하는 일이 터졌다. 이러한 가운데 여러 도시에서 지진이 발생해 인명피해까지 터지는데, 티메시테우스와 필리푸스 아라부스 형제 등 주요 내각 인사들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와 개인적 복수를 위해 아퀼레이아 공성전에서 활약한 장군들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고 기록말살형을 하거나, 연공금 협상에서 율리아 마마이아 같은 실수를 하는 등 곳곳에서 실수를 연발했다. 심지어 똑똑하다고 서술된 고르디아누스 3세 역시 지진이 터지고 동부에서 페르시아가 공격해왔다는 소식에 한 일이라곤, 신탁서를 펼치고 주술행위를 했다.[* 다만 이 점은 참작의 여지가 있다. 현대인들은 "자연재해가 빗발치는데 주술행위만 했다"라며 이상하게 여길 수 있겠지만, 당대 로마인 입장에서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은 미신을 신봉하는 경향이 강했고[* 전투를 치르기 전 닭에게 모이를 줘서 닭이 모이를 먹는 모습을 관찰해 전투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판단하기도 했다.], 만사가 신의 뜻대로 이뤄진다고 확신했다. 제국 각지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현상 역시 신의 징벌이라고 여겨 민심이 흉흉했을 테니, 그들을 달래는 차원에서 시빌라의 예언집을 참고하여 제사를 지내는 등의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실제로 당대 역사가들은 이 일화에 대해 어떠한 비판도 가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오노는 이러한 이야기는 죄다 뺐다. 아울러 그녀는 동시대 사람으로 원로원과 황제, 고르디아누스 일가 모두를 제3자 입장에서 서술한 헤로디아누스의 의견 등은 아예 언급하지도 않으면서, 고르디아누스 3세의 등장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본 당대 로마인들의 시각은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다. * 데키우스 황제 때 고트족이 침입한 이유는 아라부스 황제 때부터 지불했던 보조금을 일방적으로 끊었기 때문이다. 또한 1년 동안 전쟁 주도권을 갖지 못한 건 아니고 여러 번 큰 승리를 거두었다. 문제는 패배한 고트족이 몸만이라도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을 데키우스 황제는 거절했고, 과거와 달리 결집력이 생긴 고트족은 도망가지 않고 배수진을 치고 저항했기에 대승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3세기 게르만족은 카이사르 때 갑옷도 입지 않고 창을 주무기로 쓰는 때와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로마군과 같은 스파타를 사용했고, 갑옷도 착용했으며 여러 부족이 동맹을 형성해서 대규모로 침입하였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걸 모르니까 '로마인의 혼을 잃어서 그렇다. 과거에 카이사르는 이랬는데 왜 지금은 못함?' 이라는 틀린 소릴 하는 것이다. * 갈리에누스 황제의 원로원 의원의 군무직 제외에 대한 평가 역시 시대착오적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미 3세기 초반부터 원로원 의원 중에서 군무 경험자가 줄고 있었다. 그렇지만 또 모든 의원이 그런 건 아니었다. 학자들은 3세기 위기 속에 전문 군인관료들이 필요했던 시대적 상황과, 잦은 내전을 일으키는 원로원 소속의 총독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라고 보고 있다. 이후 군무와 정무를 분리하는 후기 로마 제국을 비판하는데, 21세기 선진국은 어떠한가를 보면 말도 안되는 소리임을 알 수있다. 전문가가 자신이 전문적인 분야를 맡는 게 당연하다. 전문가들의 모임인 코미타투스나 이후 정식 관료들이 황제 주위에서 올바른 조언을 해줄 수도 있었기에 이후 장군 출신 황제가 대부분이었지만 정치를 잘만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